우리 나라 난의 역사와 전망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통일신라의 고운(孤雲)
"夫人德芳蘭蕙 禮潔 繁 遽失所天加沒干地........."(부인의 덕은 혜처럼
향기롭고 예는 빈번(개구리밥과 산 흰 쑥)처럼 조촐
한데 갑자기 남편을 잃음에 땅에 묻히어 죽은듯하다
........... ) 이는 왕비의 덕을 난 혜(蘭蕙)에 비유한글로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고운(孤雲)의 다른 싯 귀 에도 난이란 글자를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傲雪蘭(오설란)
彈入宣尼操(탄입선니조)
爲大夫佩(인위대부패)
十董當一蘭(십동당일란)
所以復見受(소이복견수)
공자가 거문고에
난조(蘭操)를 싣고 대부의 패에는 난을 새기네 난 한 송이가 열을 당하니 이에 다시 보고
사랑하노라 오설 란 을 노래하며 충절을 나타낸 이는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난은 높은 격으로 노래되었고 매창(梅窓)이나 난설헌(蘭雪軒) 등의 여류시인들은 물론 휴정이나 유정 등의 고승들의
작품에서도 난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묵란화(墨蘭畵)는 고려 말 옥서침과 윤삼산이 그렸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현존하는 최고품은 조선 선조시대의 이증(李 )이 그린 춘란도(春蘭圖)이다
특히 조선말의
本國蘭蕙品類不多 移盆後葉漸短香亦劣殊 失國香之義 故看花者不甚尙
然生湖南沿海諸山者品佳
霜後勿傷垂帶
舊土依古方截盆爲妙
우리나라에는 난 혜의 종류가 많지
않은데 분에 옮긴 후 잎이 점차 짧아지며
향기 또한 겨우 나는 정도여서 국향의 뜻을
잃는다.
그러므로 꽃을 본 자는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남연해의 여러 산에서 나는 것은 그 품종이
아름답다.
서리가 내린 후에 뿌리가 상하지 않게 자생지의 흙으로 싸주고 옛 방식에
의하여 분에 심으면
좋다.
이것으로 15세기에는 이미 중국 란 이 알려졌음은
물론 한국춘란도 발견되어 기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藍)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산림경제(山林經濟)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등 적지 않은 문헌들에서 난에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특히
그후 한란은 추사
이렇듯이 난에 관한 시문(詩文) ,묵란도(墨蘭圖)와 문헌들이 많으나 널리 가꾸어 졌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일부 지식층에 한정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나마 많은 수는 관념에 의한 난 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국춘란은 향을 중요시하는 중국풍에 젖었던 지식층에 있어 양화 소록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관심이
미미했다.
한국춘란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이다 소수
특권계층에 의하여 움직여지던 난 취미계가 수입이 자유로 와 짐으로 인하여 넓게 확산되기 시작됐다.
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많은 사람의 안목이 높아지면서 애란인 들은 우리의 것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춘란은 본래 녹색의 잎과 녹색의 꽃이나 우리의 것에 대한 애착으로 서서히 적화,황 화, 주금 화 등의 색 화(色花)와 복륜, 중 투
호 등 잎이 변이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고 거의 모든 화 예 품(花藝品)과 옆 예 품(葉藝品)이
망라되어 발견되었다.
이제는 난 문화(蘭文化) ,
난 계(蘭界)라는 말이 자주 나올 정도로
발돋움 하였으며 동호인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불붙은 한국춘란의 붐은 우리의 난(蘭)이라는 자긍심을 높여주었고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단아한 자태의 모습은 애란인 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화색이나 무늬가 점차 고정되면서 이제 한국춘란은 우리 난 계에 구심점이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한국춘란이 이렇게 발전하고 사랑을 받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춘란의 자질로 어디에나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우수한 품종 들이 많다.
둘째, 한국인의
미(美)의식의 발전으로 완상(玩賞)할 수 있는 능력의 애란 인이 많아
졌다.
셋째, 애란 인의 증가로 인한 채란인의 증가와 우리의 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넷째,
취미 애란 가들의 동호 인회 결성이 왕성히 일어나 난 개발에 박차가
가해졌다.
다섯째, 전시회가 활발히 일어나 정보교환 및 난 고정 배양에
힘을 쏟았다.
여섯째, 난 전문상이 생겨 우수품종의 난을 보급 배양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일곱째, 난 전문잡지 등을 통하여
활발한 정보교환이 난 계 발전을 가속화 시켰다.
예로부터 민족과 함께 우리나라에
자생해온 한국춘란은 화려하지도 않고 드러내지 않는 수줍은 자태 그 단아한 모습이 비로소 우리 곁에 다가왔다.
난을 가까이 하기 전에는 그다지 변하지 않는 그저 푸르기만 한 초본식물이라 느낀다.
그러나 가까이 하게 되면 난의 변화에 매료되고 만다.
미의 감각이 발달되면 될수록 점점 그 미학으로 세계인의 공통어가 되는 것이 난이다.
한국 란 개발 10년 정도에 훌륭한 자질의 난이
많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 난 계로서는 매우 뿌듯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동호인들이 늘어났고 배양에 온정 성을 기울이는 배양가도 많아졌다.
아직까지 고정되지 않은 품종들이 고정화를 기다리고 있는 싯점 에서 우리 난 계의 과제는 이러한
한국춘란을 원예화시켜 고정화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은 무한하기에 이제껏 발전해온 한국 난 계의 기쁨 못지않게 발전해 나갈 기다림의 기쁨도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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